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가와 준 (문단 편집) === YAPOOS 시기 === 토가와 준은 기존 알파 레코드에서 이적해 YAPOOS 명의로 쇼치쿠 계열인 테이치쿠 레코드에서 야푸즈 첫 앨범 ‘ヤプーズ計画(야푸즈 계획)’을 1987년 발매한다. 수록곡은 야푸즈 멤버들 5명이 2곡씩 각자 작곡해서 수록했고 작사의 대부분은 토가와 준 본인이 맡았다.야심차게 내놓은 해당 앨범은 저조한 성적을 내며 예술적으로는 뉴웨이브, 신스팝 분야의 수작인 것과 별개로 토가와 준의 상업적 인기 하락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1988년 우에노 코우지, 오오타 케이이치와 함께 게르니카를 재결성한 토가와 준은 게르니카 2집 ‘新世紀への運河(신세기로의 운하)’를 발표한다. 버블시대답게 풀 오케스트라와 혼섹션의 구성으로 재시작된 게르니카 2집은 오리콘 차트 60위권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그저 숨고르기라는 듯 게르니카 2집 이후 야푸즈 명의의 2번째 앨범인 ‘大天使のように(대천사처럼)’을 발표하고 이는 오리콘 30위권에 올라가는 정도로 소소하게 히트한다. 그리고 1989년 발표한 게르니카 3집과 본인 솔로 명의의 4집이 각각 오리콘 50위권, 70위권에 그치는 아쉬운 성과를 내었다. 이 시기의 토가와 준은 쇼치쿠 영화 시리즈인 [[낚시 바보 일지]]나 [[남자는 괴로워]]에 매진하게 되고 단발성으로나마 드라마에 자주 얼굴을 비치게 된다. 특히 낚시 바보 일지는 초기부터 90년대 중순의 시리즈까지 꾸준히 출연했다. 1991년, 맴버 두명의 탈퇴를 겪으며 토시바 EMI로 이적한 야푸즈의 서드 앨범인 ‘ダイヤルYを廻せ!(다이얼 Y를 돌려라!)’[* 수록곡 赤い戦車(붉은 전차)의 가사가 [[니혼바시 요코]]의 만화 [[G전장 헤븐즈 도어]]를 통해 소개되었고, 한국에도 정발판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려졌다] 가 발표되지만 오리콘 60위권에 머무는 수준이었다. 1992년 키보드와 드럼을 맡던 맴버가 추가로 탈퇴하면서 야푸즈의 정체성이 위태로워졌다. 이시기 도움을 준 것이 [[히라사와 스스무]]로 비슷한 시기 시작된 히라사와 스스무의 앨범 피쳐링에 참여하고, 토가와 준의 앨범에 히라사와 스스무가 편곡을 도와주었으며, 방송에 동반 출연하거나 언급해주는 등 광범위한 협력이 돋보였던 시기였기에 야푸즈에도 히라사와 스스무의 영향력이 강하게 들어왔다. 더하여 새로 영입한 키보드 맴버가 히라사와 스스무가 이끌던 밴드 p-model의 카피밴드 출신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한 앨범인 ’dadadaism‘(92), ‘ヤプーズの不審な行動(야푸즈의 의심스러운 행동)‘(95), 'HYS'(95)는 보컬보다 악기의 비중이 강해졌다. 1995년 기존 야푸즈 멤버들도 베이스의 나카하라 노부오를 제하면 거의 교체되다시피 하여 소속감도 점점 사라져가던 중. 당시 레이블이었던 콜롬비아 레코드의 방향성과 개런티에 얽힌 분쟁, 과도한 스케줄과 이로 인한 컨디션 악화, 서포트 멤버들의 잇따른 탈퇴와 교체에 이어 콜롬비아에서 무단으로 편집한 라이브 비디오가 발매되자 토가와 준은 자택에서 면도칼로 목을 긋는 자살 시도를 하게 됐다. 다행히 면도날이 경동맥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지라 목숨은 건졌으나 거짓으로 자살시도를 했다는 주간지나 스포츠 신문의 악평과 자해시에 나온 피로 방의 벽에 '皆憎(개증, 모두 증오한다)'이라고 써놓은 것으로 매스컴을 달군다. 자살시도 사건 이후 한동안 무대활동이나 뮤지컬에 집중하던 토가와 준은, 가끔 성우 [[미야무라 유코]]의 곡을 작사해준다거나 가끔씩 라이브를 하면서 소일하며 영화, 드라마 모두 활동을 금지한 채 인디즈로만 활동한다. 1998~1999년 경에는 발전한 기술력에 따라 홈레코딩을 통해 녹음한 ‘cd-y’를 발매, 라이브 회장에서나 볼 수 있던 환상의 물건이었으나 후일 통신판매 또한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